지난 화가 사용자 쪽에서 정하고 뒤집은 기록이었다면, 이번엔 덜어내고 다시 고친 기록이다. 그 사이에는 이미 고친 걸 또 기획하고 있었던 일도 끼어 있다.
다시 굴리기, 이미 적혀 있던 기능
『강릉, 오늘』은 그날 기분, 체력, 동행, 날씨를 고르면 카드 한 장과 함께 추천 장소, 오늘의 코스를 주는 앱이다. 카드는 12종이고, 카드마다 그림체가 다섯 가지씩 있다(앱에서는 '테마'라고 부른다). 카드를 뽑으면 그중 하나를 갖게 되고, 나머지는 하나씩 모아 간다.
8월 18일부터 이틀 동안, 이 그림체를 두고 한 일을 순서대로 적으면 이렇다.
- 그림체 고르는 질문을 뺐다. 원래는 카드를 뽑을 때마다 그림체부터 고르게 했다. 그런데 이 선택은 어떤 카드와 장소가 나오는지에 아무 영향이 없었다. 게다가 직접 고르면 모으는 재미가 아니라 그냥 설정이 돼 버린다.
- 대신 아직 없는 그림체가 먼저 나오게 했다. 아무렇게나 주면 전부 모으는 데 하루 세 장씩 뽑아도 94일이 걸린다. 없는 것부터 주면 20일이면 된다.
- 그림체만 다시 뽑는 버튼(다시 굴리기)을 만들었다. 나온 그림체가 마음에 안 든다고 카드를 통째로 다시 뽑으면, 추천은 그 카드가 이 사람과 안 맞는다고 잘못 배운다. 그래서 카드는 두고 그림체만 바꿔 볼 수 있게 했다.
- 같은 날 구멍을 막았다. 버튼을 계속 누르면 그 자리에서 다섯 그림체를 다 모을 수 있었다. 다른 AI에게 한 번 더 검토를 맡겼다가 찾은 구멍이다. 그래서 다시 굴려서 나온 그림체는 구경만 하고 갖지는 못하게 바꿨다. 더 갖고 싶으면 공유로 열면 된다. 그때 남긴 말은 "공유하기했을때 열리는것도 있고 하니깐 그런걸로 하면 되잖아"였던 듯?
- 다음 날, 버튼을 통째로 철회했다. 내가 남긴 말은 "화면만 바뀌는게 무슨 의미인가 싶긴한데"였다. 확인해 보니 결과 화면에서 다섯 그림체를 옆으로 넘기며 미리 보는 기능이 기획서에 이미 적혀 있었다. (지금 보면 좀 민망하다.) 무작위로 굴리는 건 직접 넘겨 보는 것보다 나은 점이 없었다.

고치려던 방향을 이미 기획서에 반영해 놓고도, 반영했다는 걸 기억하지 못해서 같은 내용을 다시 기획하고 있었던 거다.
이 일로 예전에 다른 기획자들한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기획한 게 많아지면 기억하기가 어렵다는 말. 실제로 요새는 동시에 다루는 기획서가 적게는 5개, 많을 땐 10개가 넘는다. 기억력이 좋은 편이긴 한데, 프로젝트가 늘고 운영하는 서비스가 많아지니까 기억이 흐려지는 순간이 생긴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기억만으로 기획서를 관리하기엔 한계가 있다는 거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사람들이 왜 세컨브레인(기억을 대신 맡아 두는 기록 장치)을 쓰는지. 머리로 다 붙잡고 있으려는 순간부터 놓치는 게 생긴다. 프로젝트를 여러 개 동시에 굴리려면, 기억을 밖에 맡겨 둘 곳이 있어야 했다.
결과 화면, 탭에서 한 줄 이야기로
6월 29일, 그 결과 화면을 갈아엎었다. 그전까지는 이유, 기록, 지도 세 탭으로 나뉘어 있었다. 기능별로 정리하면 깔끔해 보이긴 한다. 근데 카드를 받은 사람이 하려는 건 탭을 오가는 게 아니었다.

세 탭을 없애고 위에서 아래로 한 줄로 읽히게 바꿨다. 맨 위에 추천 장소랑 오늘의 코스를 두고, 그 아래에서 왜 이 카드인지 더 볼 수 있게. 지도는 탭이 아니라 장소를 누르면 열리는 창으로, 기록은 결과 화면에서 빼서 도감(코스를 다 돈 카드가 모이는 곳)의 카드 상세로 옮겼다.
숫자 세 칸을 지운 날
코스의 장소에 들러 체크인을 누르면 도장이 하나 찍힌다. 9월 6일, 마이페이지 위쪽의 통계 세 칸(뽑은 카드 수, 찍은 도장 수, 코스를 다 돈 카드 수)을 지웠다. 다 돈 카드 수는 홈이랑 도감에도 있어서 같은 숫자가 세 군데에 있었고, 도장 수도 두 군데에 있었다. 뽑은 카드 수는 성과가 아니라 시도 횟수라서 봐도 할 일이 안 생겼다. 그 자리엔 강릉과 함께한 지 며칠째인지와 마지막으로 다녀온 여정(카드 한 장으로 하루 코스를 돈 기록을 앱에서는 이렇게 부른다)을 두 줄로 보여 주기로 했다.
이건 말로만 정하지 않았다. 컴퓨터에 띄운 휴대폰 화면(에뮬레이터)에 세 안을 실제로 그려 놓고 비교한 다음 정했다.

끝내는 버튼이 필요할까
카드를 받고 '이 여정 시작하기'를 누르면, 추천 코스를 따라 장소를 하나씩 도는 화면으로 넘어간다. 원래 이 화면에는 코스를 중간에 끝내는 버튼이 있었다. 누르면 그만두는 이유를 고르는 창이 뜨고, 그날 코스는 끝난 걸로 처리됐다.
10월 초에 이 버튼을 없앴다. 시작은 내 질문이었다. "근데 종료할일이 있어? 이게 이상한데 시간이 이미 그 다음날이여야 가능한거 아님?" 코스는 그날 하루를 위한 건데, 하루가 끝나기도 전에 굳이 '끝내기'를 누를 일이 있나 싶었다. 하루가 지나면 코스도 저절로 끝나는 게 자연스럽다.

버튼이 있어서 생기는 문제도 있었다. 하루에 카드는 세 장까지 뽑을 수 있는데, 코스를 중간에 끝내면 홈이 처음 상태로 돌아가서 남은 횟수로 다시 뽑을 수 있었다. 그러다 같은 카드가 또 나와 끝까지 돌면, 한 날짜에 여정이 두 개 생긴다. 그때 남긴 말은 "두번 뽑는다는 자체가 이상함".
그래서 코스는 다 돌거나, 자정이 되면 닫히도록 정했다. 첫 장소에서 체크인을 한 뒤에는 그날 새 카드를 뽑을 수 없다. 화면을 잠깐 나가는 건 그대로 되고, 코스는 진행 중으로 남는다. 자정에 닫혀도 그날 찍은 도장이나 사진, 메모는 그대로 남는다. 다만 끝까지 돌지 못한 카드라 도감에는 올라가지 않는다.
뒤집은 기록에서 보이는 것
돌아보면 기능을 더할 때보다 덜어낼 때 이유가 더 선명해졌다. 결과 화면의 탭을 없앴고, 중복되는 통계 세 칸을 지웠고, 종료 버튼도 뺐다. 지난 화의 공유를 네 단계에서 한 단계로 줄인 것도 같은 쪽이다. 처음 안은 기능의 모양에서 출발했고, 뒤집은 안은 쓰는 사람이 실제로 하려는 일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카드를 받은 사람에게는 오늘 갈 곳부터 보여 주고, 마이페이지에서는 봐도 할 일이 안 생기는 숫자를 덜어내고, 코스는 하루가 끝날 때 닫히게 했다. 뒤집은 기록이 공통으로 가리키는 질문은 결국 하나다. 이 화면을 연 사람은 지금 뭘 하려고 하는가.
기획이나 기능을 만들 때 기획자랑 개발자가 머리가 아프면 아플수록 더 좋은 서비스가 나온다는 말이 있다. 그 지론을 믿는다. 정했다가 뒤집은 기록은 결국 그 머리 아픈 시간의 흔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