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다꿈

강릉, 오늘 제작기 · EP.03

이미 고친 걸 또 기획하고 있었다

동시에 기획서를 5개에서 10개씩 다루다 보니, 이미 고친 방향을 잊고 같은 걸 또 기획하고 있었다. 기획서 관리와 세컨브레인, 그리고 덜어낸 기록.

2026-10-10 · 글 소유리

지난 화가 사용자 쪽에서 정하고 뒤집은 기록이었다면, 이번엔 덜어내고 다시 고친 기록이다. 그 사이에는 이미 고친 걸 또 기획하고 있었던 일도 끼어 있다.

다시 굴리기, 이미 적혀 있던 기능

『강릉, 오늘』은 그날 기분, 체력, 동행, 날씨를 고르면 카드 한 장과 함께 추천 장소, 오늘의 코스를 주는 앱이다. 카드는 12종이고, 카드마다 그림체가 다섯 가지씩 있다(앱에서는 '테마'라고 부른다). 카드를 뽑으면 그중 하나를 갖게 되고, 나머지는 하나씩 모아 간다.

8월 18일부터 이틀 동안, 이 그림체를 두고 한 일을 순서대로 적으면 이렇다.

  1. 그림체 고르는 질문을 뺐다. 원래는 카드를 뽑을 때마다 그림체부터 고르게 했다. 그런데 이 선택은 어떤 카드와 장소가 나오는지에 아무 영향이 없었다. 게다가 직접 고르면 모으는 재미가 아니라 그냥 설정이 돼 버린다.
  2. 대신 아직 없는 그림체가 먼저 나오게 했다. 아무렇게나 주면 전부 모으는 데 하루 세 장씩 뽑아도 94일이 걸린다. 없는 것부터 주면 20일이면 된다.
  3. 그림체만 다시 뽑는 버튼(다시 굴리기)을 만들었다. 나온 그림체가 마음에 안 든다고 카드를 통째로 다시 뽑으면, 추천은 그 카드가 이 사람과 안 맞는다고 잘못 배운다. 그래서 카드는 두고 그림체만 바꿔 볼 수 있게 했다.
  4. 같은 날 구멍을 막았다. 버튼을 계속 누르면 그 자리에서 다섯 그림체를 다 모을 수 있었다. 다른 AI에게 한 번 더 검토를 맡겼다가 찾은 구멍이다. 그래서 다시 굴려서 나온 그림체는 구경만 하고 갖지는 못하게 바꿨다. 더 갖고 싶으면 공유로 열면 된다. 그때 남긴 말은 "공유하기했을때 열리는것도 있고 하니깐 그런걸로 하면 되잖아"였던 듯?
  5. 다음 날, 버튼을 통째로 철회했다. 내가 남긴 말은 "화면만 바뀌는게 무슨 의미인가 싶긴한데"였다. 확인해 보니 결과 화면에서 다섯 그림체를 옆으로 넘기며 미리 보는 기능이 기획서에 이미 적혀 있었다. (지금 보면 좀 민망하다.) 무작위로 굴리는 건 직접 넘겨 보는 것보다 나은 점이 없었다.

바닷가 돌담에 앉은 여행자 캐릭터가 카드 한 장을 들고 있고, 머리 위에 같은 카드의 다섯 그림체가 떠 있는 모습. AI로 만든 그림

고치려던 방향을 이미 기획서에 반영해 놓고도, 반영했다는 걸 기억하지 못해서 같은 내용을 다시 기획하고 있었던 거다.

이 일로 예전에 다른 기획자들한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기획한 게 많아지면 기억하기가 어렵다는 말. 실제로 요새는 동시에 다루는 기획서가 적게는 5개, 많을 땐 10개가 넘는다. 기억력이 좋은 편이긴 한데, 프로젝트가 늘고 운영하는 서비스가 많아지니까 기억이 흐려지는 순간이 생긴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기억만으로 기획서를 관리하기엔 한계가 있다는 거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사람들이 왜 세컨브레인(기억을 대신 맡아 두는 기록 장치)을 쓰는지. 머리로 다 붙잡고 있으려는 순간부터 놓치는 게 생긴다. 프로젝트를 여러 개 동시에 굴리려면, 기억을 밖에 맡겨 둘 곳이 있어야 했다.

결과 화면, 탭에서 한 줄 이야기로

6월 29일, 그 결과 화면을 갈아엎었다. 그전까지는 이유, 기록, 지도 세 탭으로 나뉘어 있었다. 기능별로 정리하면 깔끔해 보이긴 한다. 근데 카드를 받은 사람이 하려는 건 탭을 오가는 게 아니었다.

카드 결과 화면을 바꾸기 전과 후. 전에는 큰 카드 아래 이유·기록·지도 탭 세 개, 후에는 추천 장소·오늘의 코스가 맨 위에 오고 그 아래 왜 이 카드일까가 이어진다. 지도는 장소를 누르면 뜨는 창으로, 기록은 도감의 카드 상세로 옮겼다

세 탭을 없애고 위에서 아래로 한 줄로 읽히게 바꿨다. 맨 위에 추천 장소랑 오늘의 코스를 두고, 그 아래에서 왜 이 카드인지 더 볼 수 있게. 지도는 탭이 아니라 장소를 누르면 열리는 창으로, 기록은 결과 화면에서 빼서 도감(코스를 다 돈 카드가 모이는 곳)의 카드 상세로 옮겼다.

숫자 세 칸을 지운 날

코스의 장소에 들러 체크인을 누르면 도장이 하나 찍힌다. 9월 6일, 마이페이지 위쪽의 통계 세 칸(뽑은 카드 수, 찍은 도장 수, 코스를 다 돈 카드 수)을 지웠다. 다 돈 카드 수는 홈이랑 도감에도 있어서 같은 숫자가 세 군데에 있었고, 도장 수도 두 군데에 있었다. 뽑은 카드 수는 성과가 아니라 시도 횟수라서 봐도 할 일이 안 생겼다. 그 자리엔 강릉과 함께한 지 며칠째인지와 마지막으로 다녀온 여정(카드 한 장으로 하루 코스를 돈 기록을 앱에서는 이렇게 부른다)을 두 줄로 보여 주기로 했다.

이건 말로만 정하지 않았다. 컴퓨터에 띄운 휴대폰 화면(에뮬레이터)에 세 안을 실제로 그려 놓고 비교한 다음 정했다.

모은 카드를 보는 도감 화면. 카드 그림은 AI로 만든 이미지입니다

끝내는 버튼이 필요할까

카드를 받고 '이 여정 시작하기'를 누르면, 추천 코스를 따라 장소를 하나씩 도는 화면으로 넘어간다. 원래 이 화면에는 코스를 중간에 끝내는 버튼이 있었다. 누르면 그만두는 이유를 고르는 창이 뜨고, 그날 코스는 끝난 걸로 처리됐다.

10월 초에 이 버튼을 없앴다. 시작은 내 질문이었다. "근데 종료할일이 있어? 이게 이상한데 시간이 이미 그 다음날이여야 가능한거 아님?" 코스는 그날 하루를 위한 건데, 하루가 끝나기도 전에 굳이 '끝내기'를 누를 일이 있나 싶었다. 하루가 지나면 코스도 저절로 끝나는 게 자연스럽다.

해 질 녘 소나무 해안길을 걸어 집으로 가는 여행자 캐릭터. AI로 만든 그림

버튼이 있어서 생기는 문제도 있었다. 하루에 카드는 세 장까지 뽑을 수 있는데, 코스를 중간에 끝내면 홈이 처음 상태로 돌아가서 남은 횟수로 다시 뽑을 수 있었다. 그러다 같은 카드가 또 나와 끝까지 돌면, 한 날짜에 여정이 두 개 생긴다. 그때 남긴 말은 "두번 뽑는다는 자체가 이상함".

그래서 코스는 다 돌거나, 자정이 되면 닫히도록 정했다. 첫 장소에서 체크인을 한 뒤에는 그날 새 카드를 뽑을 수 없다. 화면을 잠깐 나가는 건 그대로 되고, 코스는 진행 중으로 남는다. 자정에 닫혀도 그날 찍은 도장이나 사진, 메모는 그대로 남는다. 다만 끝까지 돌지 못한 카드라 도감에는 올라가지 않는다.

뒤집은 기록에서 보이는 것

돌아보면 기능을 더할 때보다 덜어낼 때 이유가 더 선명해졌다. 결과 화면의 탭을 없앴고, 중복되는 통계 세 칸을 지웠고, 종료 버튼도 뺐다. 지난 화의 공유를 네 단계에서 한 단계로 줄인 것도 같은 쪽이다. 처음 안은 기능의 모양에서 출발했고, 뒤집은 안은 쓰는 사람이 실제로 하려는 일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카드를 받은 사람에게는 오늘 갈 곳부터 보여 주고, 마이페이지에서는 봐도 할 일이 안 생기는 숫자를 덜어내고, 코스는 하루가 끝날 때 닫히게 했다. 뒤집은 기록이 공통으로 가리키는 질문은 결국 하나다. 이 화면을 연 사람은 지금 뭘 하려고 하는가.

기획이나 기능을 만들 때 기획자랑 개발자가 머리가 아프면 아플수록 더 좋은 서비스가 나온다는 말이 있다. 그 지론을 믿는다. 정했다가 뒤집은 기록은 결국 그 머리 아픈 시간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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