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다꿈

강릉, 오늘 제작기 · EP.01

장소는 나오는데, 오늘 하루는 나오지 않았다

AX를 꿈꾸는데 환경이 안 갖춰진 회사에서, 먼저 회사 밖에서 해 보기로 했다. 장소는 나오는데 하루는 나오지 않는 문제, 왜 강릉 여행이었고 왜 타로 콘셉트였는지.

2026-10-10 · 글 소유리

시작은 사실 여행 앱이 아니라 회사였다. 바이오 회사에서 AX(AI 전환)를 꿈꾸고 있었는데, 개발 얘기만 나오면 맨날 보안, 보안, 보안. 그러니 뭘 하나 테스트로 적용해 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AI를 안 쓰던 개발자들을 한 명씩 설득해서 전체 분위기는 바꿔 놨다. 근데 분위기가 바뀌는 거랑 실제 업무에 적용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그 계기를 직접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기획자의 장점을 살리기로 했다. 기획으로 시작하는 공모전, 한국관광공사 공모전의 앱 개발 부문 1차에 냈고, 당당히 합격했다. 그게 계기가 돼서 기획과 개발을 AI로 이어 보는, 이른바 AI 네이티브 작업이 시작됐다.

그래서 이 연재는 강릉 여행 앱 이야기이면서, AX를 꿈꾸지만 환경이 갖춰지지 않은 회사에서 AX를 어떻게 만들어 갈 수 있는지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회사 안에서 바로 해 보기 어려운 걸 회사 밖 프로젝트에서 먼저 끝까지 해 보고, 그 과정에서 통한 방식과 막힌 지점을 남기려고 한다.

처음 기획서에 적은 문장은 장소가 아니라 하루에 관한 거였다. 강릉에는 갈 곳이 넘치는데, 오늘의 나한테 맞는 하루를 고르는 건 여전히 어려웠으니까. 『강릉, 오늘』은 그 문장에서 시작했고, 기분과 체력, 동행, 날씨를 고르면 카드 한 장으로 강릉의 하루 코스를 골라 주는 여행 앱이 됐다.

문제를 한 문장으로 적었다

2026년 5월 19일, 기획서 첫 문서에 문제를 이렇게 적었다.

강릉을 검색하면 장소가 나오지만, 오늘의 나(우리)에게 어울리는 하루는 나오지 않는다.

지도 앱이랑 블로그에는 강릉 카페랑 해변이 정말 넘친다. 근데 같은 강릉이어도 누가, 어떤 상태로 가느냐에 따라 필요한 하루는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문제 문서에 여행자를 다섯 갈래로 나눠서, 각자 어디서 막히는지 적어 봤다.

  • 재방문자: 강릉을 여러 번 와 봤는데 매번 같은 카페만 검색하게 된다. 새로운 게 고프다.
  • 첫 방문자: 정보가 너무 많아서 뭘 골라야 할지 망설인다. 결정 피로.
  • 혼자 여행자: 추천 대부분이 동행을 전제로 해서, 혼자에게 맞는 큐레이션이 없다.
  • 가족 여행자: 아이나 부모님이랑 같이 갈 때의 이동 거리, 체력, 나이를 고려한 추천이 없다.
  • 커플과 친구: 같이 가는 사람 취향의 교집합을 반영한 추천이 없다.

다섯 경우를 따로 적었는데 막히는 지점은 비슷했다. 동행, 날씨, 컨디션 같은 오늘의 변수가 추천에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다녀오고 나면 사진 몇 장만 남고, 그날 어떤 순서로 왜 거길 갔는지는 흩어져서 다시 올 이유도 약해진다는 것.

검색은 장소 목록에서 끝나지만, 강릉, 오늘은 오늘의 상태 입력, 카드 뽑기, 체크인, 하루 기록, 도감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만든다는 비교 그림

AI에게 물어보면 되지 않나

제일 먼저 나한테 던진 반론이다. AI한테 "강릉 코스 짜줘" 하면 몇 초 만에 그럴듯한 코스가 나오니까. 그래서 문제 문서에 답을 적어 뒀다. AI는 코스를 빨리 써 주지만, 그 코스를 실제로 도는 동안에는 곁에 없다. 체크인도, 도장도, 다녀온 뒤의 기록도, 다음 여행으로 이어지는 고리도 없다.

그래서 『강릉, 오늘』의 중심은 추천 한 번이 아니라 흐름 전체가 됐다. 사용자 흐름 문서에는 이걸 일곱 단계로 그렸다. 웹이나 SNS에서 발견하고, 앱을 깔아서 짧게 온보딩하고, 오늘의 상태를 10초 안에 고르고, 카드를 뽑고, 추천 장소를 돌며 체크인과 도장을 모으고, 카드를 완성해서 하루를 기록하고, 도감이 쌓여서 다시 찾게 되는 것. 마지막 단계는 다시 세 번째로 돌아간다.

왜 타로 콘셉트였나

여행은 보통 설렘을 안고 간다. 그 설렘을 어딘가 운명에 맡기는 느낌이 타로랑 비슷하게 느껴졌다. 조금 특별한 여행을 운명처럼 선물하고 싶었고, 타로 콘셉트는 그 마음에서 나온 연결점이다.

그래서 기분, 체력, 동행, 날씨를 고르면 12종 카드 중에 오늘의 한 장이 나온다. 뽑는 형식은 고르는 부담도 줄여 주고, 뽑는 순간을 작은 사건으로 만들어 준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부채처럼 펼친 카드 덱에서 한 장을 고르는 여행자 캐릭터. AI로 만든 그림

다만 기능 설계 원칙 다섯 개 중 두 번째 줄은 이렇다. 타로는 형식, 큐레이션은 본질. 카드가 아무리 예뻐도 그날 가 볼 만한 곳을 못 골라 주면 의미가 없다. 나머지 원칙도 같은 방향이다.

  1. 모든 기능은 학습 흐름에 기여한다. 사용자의 행동이 다음 추천의 재료가 된다.
  2. 타로는 형식, 큐레이션은 본질.
  3. 앱은 현장, 웹은 소개와 진입. 채널마다 역할을 나눈다.
  4. 피드백은 보상.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주면 바로 보상한다.
  5. 완성도가 화려함보다 먼저다.

형식에 대한 걱정도 문서에 남겼다. 가족 여행자나 40대 이상한테 타로는 점집을 떠올리게 해서 거부감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앱 안에서는 "타로"라는 말을 줄이고 "오늘의 카드"라고 부른다.

왜 강릉이었나

강릉은 나한테 여러 번 다녀온 곳이다. 갈 때마다 다른 장소에 갔는데, 늘 색다르게 즐거웠다. 그 기분을 나누고 싶었다.

도시로 봐도 잘 맞았다. 카페, 해변, 골목, 축제, 로컬 식당처럼 카드에 담을 이야기가 많고, 수도권에서 1~3일 다녀오기 좋고, "한가하게 도는 강릉"이라는 정서가 이미 있는 도시였다. 바쁜 사람도 워케이션으로 가기 좋은 곳이라는 점도 컸다. 안목해변, 경포, 초당동 골목, 강릉 커피거리가 카드 이야기의 뼈대가 됐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앞에서 말한 한국관광공사 공모전(2026 관광데이터 활용 공모전) 공고에, 우수한 '지역특화 서비스'에는 해당 지역 관광공사 특별상을 더 준다는 내용이 있었다. 강원도 그 지역에 들어 있었다. 한 지역을 골라 깊게 파는 쪽이 공모전에서도 기회가 하나 더 있는 셈이었다.

아침 강릉 해변에서 카드 한 장을 들고 선 여행자 캐릭터와 모래 위에 그려진 하루 경로. AI로 만든 그림

근데 7월 초에 관광공사 데이터를 실제로 조회해 보니 반전이 있었다. 강릉 관광지 목록에 강릉을 대표하는 안목해변, 경포대, 오죽헌, 커피거리가 안 보였다. (이게 없다고...?) 그래서 카드에 붙는 장소는 팀이 직접 고른 목록으로 만들고, 공공 데이터는 강릉을 넓게 둘러보는 탐색에 쓰는 두 층 구조로 설계했다. 강릉의 결에 맞춘 큐레이션 자체를 이 서비스의 자산으로 본 거다.

숫자는 한 번 더 뒤집혔다

8월 24일, 지역을 법정동 코드로 다시 조회해 봤다. 관광지는 49건에서 149건으로, 전체는 695건에서 1,004건으로 늘었고, "해변"으로 찾은 결과도 3건에서 22건이 됐다.

지역 코드로 잰 옛 숫자와 법정동 코드로 다시 잰 숫자 비교. 관광지 49에서 149, 합계 695에서 1,004, 해변 검색 3에서 22

조회 규칙은 이미 법정동 코드로 바뀌어 있었고, 개발 중인 서버도 그렇게 구현돼 있었다. 그런데 그 규칙으로 다시 잰 숫자가 기획 문서에 안 들어와 있었다. 규칙은 서 있는데 숫자는 옛 기준에 머물러 있었던 거다. 이 일 뒤로 습관이 하나 생겼다. 데이터에 대한 판단은 한 번 잰 숫자가 아니라, 지금 다시 잰 숫자로 한다.

혼자 다 해 보기로 한 실험

숫자를 다시 재면서 하나 더 봤다. 문서랑 구현은 서로 다른 속도로 바뀔 수 있다는 것. 사실 이 프로젝트는 기획자와 개발자가 각자 AI로 기획부터 구현까지 이어 보는 실험이기도 했다. 7월 초에는 같이 일하던 AI가 범위를 혼자 감당할 만큼 줄이자고 제안했는데, 내가 기각했다. 기획서가 여러 명의 팀을 전제로 쓰인 건 의도였고, 모든 역할을 직접 겪어 보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지금은 서버 두 명, 앱 화면 한 명, 기획과 AI 기능 한 명이 나눠 맡고 있다. 앱을 깔기 전에 먼저 둘러볼 수 있는 소개 웹은 9월에 공개했고, Android 앱은 Google Play에 올렸다. 다음 화에는 그 과정에서 내가 정했다가 내가 뒤집은 것들을 모았다.

강릉, 오늘의 오늘의 기분 고르기 화면. 기분부터 한 번에 한 질문씩 고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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